비극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에바(틸다 스윈튼)는 원치 않았던 임신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케빈을 낳는다. 그녀는 최선을 다해 아들을 받아들이려 하지만, 케빈은 어릴 때부터 유난히 반항적이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아이였다. 그녀가 다가가면 밀어내고, 아버지 앞에서는 천사처럼 행동하면서도 엄마에게는 차갑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 에바는 점점 그와 교감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끼지만, 남편 프랭클린(존 C. 라일리)은 아내의 고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시간이 지나면서 케빈은 더욱 불길한 행동을 보인다. 동생을 해치는가 하면, 어머니를 조롱하듯이 행동하고, 점점 더 감정 없는 존재가 되어 간다. 에바는 계속해서 경고를 보내지만, 남편과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예민하다고 치부할 뿐이다. 그리고 결국 케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른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리고 그 일이 벌어진 후에도, 모든 시선은 에바를 향한다. 그녀가 더 좋은 엄마였다면, 그녀가 더 사랑해줬다면, 그녀가 더 잘했더라면….
케빈은 어머니에게 요구된 사회적 통념의 집약체였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악은 타고나는가?"가 아니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영화는 어머니에게 부과되는 과도한 책임과 사회적 기대를 신랄하게 묘사한다. 에바는 처음부터 양육을 원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여행을 좋아했고, 독립적인 삶을 즐겼으며, 아이가 없는 인생을 꿈꾸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임신과 함께 그녀는 '어머니'라는 역할을 강요받는다.
영화에서 케빈은 단순한 아이가 아니라, 사회가 어머니에게 요구하는 것들의 집약체처럼 느껴진다. 아이의 모든 감정과 행동을 받아주어야 하며, 실수를 용납하지 않아야 하고, 아이가 저지른 모든 잘못에 대해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 심지어 아이가 비극적인 일을 저질렀을 때조차, 그 책임은 결국 어머니에게 돌아간다.
아버지는 어떤가? 프랭클린은 양육자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에서 마치 손님처럼 행동한다. 그는 케빈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아이를 키운다고 볼 수 없다. 에바가 경고할 때 그는 늘 “네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라며 무시하고, 문제의 본질을 보려 하지 않는다. 케빈 역시 아버지에게는 순한 모습만 보여주며, 모든 분노와 적대감을 어머니에게만 쏟아낸다. 그리고 그 결과가 터졌을 때, 사회는 또다시 어머니를 비난한다. "왜 더 좋은 엄마가 되지 못했냐"고.
케빈의 기저귀, 자의식 과잉, 그리고 수동적 공격성
케빈은 단순히 감정이 없는 아이가 아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어머니를 조종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중 가장 상징적인 행동이 기저귀를 뗄 수 있음에도 계속 차고 다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아이는 스스로의 성장을 원하며 기저귀를 떼는 과정에서 자율성과 독립심을 키운다. 하지만 케빈은 일부러 기저귀를 떼지 않으며, 그것을 하나의 무기로 사용한다.
이 행동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유아퇴행적 행동을 통한 어머니에 대한 도발
케빈은 기저귀를 차고 있는 동안 어머니가 계속해서 자신을 돌봐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는 일종의 수동적 공격(passive-aggressive) 형태로, 겉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어머니에게 지속적인 스트레스를 가하는 행동이다.
에바는 그런 케빈을 보며 점점 지쳐가고, 짜증을 내지만, 그 순간에도 사회는 “엄마는 아이를 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케빈은 기저귀를 통해 어머니가 점점 더 무력해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조롱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의식 과잉과 통제 욕구
케빈은 매우 똑똑한 아이이며, 자신이 하는 행동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는 어머니를 좌절시키기 위해 기저귀를 떼지 않으며, 다른 사람 앞에서는 마치 아무 문제없는 아이처럼 행동한다.
그는 어머니를 압박하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으며, 그 방식이 폭력적이지 않더라도 철저하게 정신적으로 그녀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이러한 행동 패턴은 그의 성장 과정에서도 이어진다. 그는 직접적인 폭력보다 수동적 공격성을 주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 필요할 때만 말을 하고, 일부러 어머니가 당황할 만한 대답을 한다.
- 아버지 앞에서는 순진한 모습으로 행동하며, 어머니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든다.
- 어머니가 폭발할 때까지 그녀를 조롱하며, 결국 사회가 어머니를 비난하도록 만든다.
결국, 케빈은 어머니를 무너뜨리는 데 있어 직접적인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어머니가 점점 감정적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즐긴다.
누가 끝까지 희생하고 있나?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에바를 본다. 그녀는 케빈이 저지른 일의 후폭풍을 혼자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캐빈이 성인이 되고 면회에 간 에바는 캐빈을 꼭 안아준다.
캐빈은 본능적으로 에바가 자신을 떠날것이라는걸 직감한듯 하지만 에바는 할 만큼 했다는 후련한 느낌으로 집을 떠난다.
이 영화는 단순한 사이코패스 소년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쉽게 어머니를 비난하고, 얼마나 많은 책임을 그들에게 떠넘기는지를 보여주는 잔인한 거울과도 같다. 에바가 케빈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 그녀의 죄였을까? 아니면, 산후 우울증에 걸린 아내를 방임한 남편 문제 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케빈의 기질 때문이었을까?
"케빈에 대하여"는 보는 내내 숨이 막히고, 보고 나서도 깊은 절망을 안기는 영화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보여주는 비극은 단순히 허구 속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서도 너무나 자주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